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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NOU 캠퍼스

2) 한국 노사관계 역사/노사관계론

by 명동팬더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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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론이라는 학문은 노동법, 인사관리, 경영학, 노동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관련 주제와 이론, 이슈, 사례 등을 모아서 재구성한 학제적(學際的, interdisciplinary) 학문이어서 그 범위가 아주 광범위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과목에서는 노동조합과 사용자와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이 둘이 단체교섭을 통해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결정해가는 과정에 그 범위를 한정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운영하는 방법, 사용자로 인정받거나 사용자로 간주 되지 못하는 사람의 요건, 단체교섭의 진행 과정, 단체교섭 실패 시 쟁의행위를 해가는 방법,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과 제도,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 임금과 관련된 이슈, 그리고 우수한 노사관계 사례 등을 다루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노사관계가 형성되어온 과정도 살펴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노사관계가 발전해온 역사를 검토해보는 것도 현 시점의 노사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므로 자세하게 학습한다.

 

강의정보

우리나라에서 임금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것은 언제이며,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처한 근로환경은 어떠한지 등을 학습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미군정청 시절의 노동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후 경제개발 시기와 민주화 시기에 노동운동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최근의 노동운동이 처한 이슈들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강의목차
  1. 임금노동자의 출현
  2. 조선말기의 노동운동
  3.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
  4. 광복 후의 노동운동

 

 

강의정리

1. 임금노동자의 출현 과정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

한반도에서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가 나타난 때는 조선시대 19세기 말엽이다.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을 하면서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 자본이 들어온 것이 시발점이다. 일본과는 1876년에 수호통상관계를 수립했으며, 미국과 청나라와는 1882년에 체결하였다. 이어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와도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했는데, 모두 극히 불평등한 것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초기에는 조선에서 가져갈 특별한 물산이 없어 한반도에 묻혀 있는 광물 개발에 주력하였다. 또한 이 광물들을 실어 해외로 반출하기 위해 부두를 확장하고 항운회사를 설립했으며, 광산과 부두를 잇는 철도를 깔고 철도회사도 설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항장의 부두노동자, 광부,  철도노동자들이 조선 최초의 임금노동자들이 되었다. 이전에도 조선에 임금노동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임금만으로 생활하지 않고 농사도 짓고 있었으며 신분적으로 예속되었고 같은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일하지도 않아 근대적임금노동자로 보기 어렵다. 

 

조선 말기에 개항을 시작으로 부두와 광산에서 대거 등장한 임금노동자들은 한 회사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집단행동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사용자로부터 자신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자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이 채광권을 취득하는 등 이권이 상실되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조건에서 일하면서 조선의 탐관오리들로부터 끊임없는 수탈까지 당하자 분노를 느낀 나머지 집단적·조직적으로 파업과 폭동, 시위를 전개하게 되었다.이런 까닭에 초기 노동운동은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과 같은 생계 보장형 실리적 접근뿐만 아니라, 외세 배격과 반정부 투쟁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며 전개되었고, 이런 점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2. 일제강점기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노동운동의 특징을 이해한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개항을 단행하였다. 그 후 1905년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합으로 마침내 국권을 상실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원료 및 식량의 공급기지로 이용하고, 자본 수출의 활로를 찾으며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1905 통감부 설치 ~ 1919  3.1운동.

이때는 일본 자본에 의해 조선의 모든 산업과 무역, 금융, 재정, 교통, 운수, 체신 부문이 일제에 편입되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시기 노동자들은  자연발생적인 저항운동을 펼치고, 초기 형태의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력을 보였다.

 

1920 ~ 1930년.

이 시기 일본은 토지 강탈과 식량 수탈을 목적으로 산미증대계획을 실시했으며, 동시에 일본의 잉여자본 투자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지하자원 개발과 공업시설 건설에 매진하는 농공병진정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최초의 노동자 전국조직, ‘조선노농총동맹’이 설립되어 1924년 ~ 1927년까지 활동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강령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를 보면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조직에는 너무 다양하고 반목하는 노동단체들이 가입하고 있어서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 격심한 분열 양상을 보이다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인들의 노동운동이 전개되어 1922년 일본에서 최초의 조선인 노동조합인 ‘도쿄조선노동동맹회’가 결성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노동운동 연대를 지향한 이 노동조합은 일본 거주 조선인 노동자의 생존권 옹호, 민족의식 고양 등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으며, 이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 가장 큰 규모의 노동쟁의는 1929년 1월13일부터 4월 6일까지 발생한 원산 총파업으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931 ~ 광복.

1930년대는 농업공황으로 농촌의 피폐화가 더욱 가중되어 소작농들의 폭력적인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1930년과 1931년의 조선 경제는 심각한 불황을 겪게 되었다. 이에 사용자들은 임금삭감과 대량 해고를 시행하였고, 자연히 노동자들은 파업을 격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제가 총동원령에 들어가면서 모든 단체와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에 노동쟁의는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단체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때 상당수의 노동운동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였으며 광복 후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노동운동가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에 가담하였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 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노동쟁의에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참여하였다. 이 당시 산업구조가 신발, 방직과 같은 경공업 중심이었기 때문에 여공들이 많이 취업하고 있었다. 이들의 근로조건은 굉장히 열악했는데 하루 12 ~16시간을 일했으며 임금삭감, 벌금, 구타가 다반사였다. 이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파업을 벌였다.

 

 

3. 광복 후 미군정하의 노동운동의 특징을 이해한다.

광복을 맞이하자 일제가 물러간 한반도는 무주공산 상태가 되어 정치는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경제는 극심한 불황이었다. 노동계를 보면 국내에 남아 있던 노동운동가 중 상당수는 1930년 말부터 일제로 전향하여 협력해 오던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지하에 숨어 지내던 좌익 계열이었다. 한편, 해외에서 들어오는 노동운동가들도 우익과 좌익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좌익과 우익, 그리고 일제에 협력했던 노동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당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미군정은 한반도에서도 노동운동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온갖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아주 다양한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1945년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남로당과 연계된 좌익 공산계열의 노조단체였다. 이들은 전국 최대의 조직으로 1946년 5월 10일의 시점으로 남한에서만 46만7천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이들은 초기에는 미군정에 협조적이었지만 이후 미소 냉전체제가 깊어가면서 미군정에 의해 불법 단체로 지정되어 소멸되었다. 

 

우익계열은 1946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설립하였으며 미군정의 지원하에 성장하였다. 이들은 이후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여 어용노조로 전락하였다가 4.19혁명이 터지면서 자유당 정권과 함께 해체되었다. 

 

 

4. 경제개발기와 1980년대 민주화 시기 노동운동의 특징을 이해한다.

경제개발기는 1961년 5.16군사정변 ~ 1987년 군부독재의 퇴장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독재적 리더십하에 경제개발을 이룩해 낸 시기이자, 노동운동이 통제되고 위축된 시기이다. 

 

1960년대

5.16군사정변의 주축 세력은 기존의 노동조합을 모두 해산시키고, 1961년에 대한노총을 대신하는 전국 조직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설립하였다. 

 

1970년대

1970년대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과 위협이 있었다. 1973년에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국내 석유가격이 하루 아침에 2, 3배씩 급등하여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국인 월맹이 승리하여 베트남이 적화 통일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런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국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노리며 1971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독재로 들어갔다. 정부는 노동관계법률을 개정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이 시기 발생한 YH기업의 파업중 여공이 사망한 사건은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1980년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사태를 거치면서 아주 짧게 ‘서울의 봄’이 왔다. 1979년에는 2차 오일쇼크도 있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실업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독재정권이 물러났음을 기념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고 노사분규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를 이어 갔다.

 

이 시기 대표적인 노사분규는 1980년 사북탄광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파업으로 이들은 경찰과 충돌하면서 격해져 사북읍을 점령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나고 다시 직선제 개헌이 실현되었다. 이 정치적 변화에 편승하여 무수히 많은 노동조합이 다시 결성되고, 노사분규로 대도시의 거리는 몸살을 앓았다. 그동안 제조업 중심으로 일어났던 노동운동에 사무직, 전문직, 기술직, 판매직 등도 가세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5. 199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과제들에 대해 이해한다.

1987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운동은 다시 통제를 받기 시작하며 소강상태에 들었다. 이때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결성하여 민주노조 세력을 결집시키려 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전노협의 후신으로 한국노총에 대항하는 제2노총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1995년에 탄생하게 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사관계를 선진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때 개정된 노동조합법은 노동기본권을 강화하면서도 오동시장의 유연성을 강화하여 노사 모두의 요구를 반영한것으로 평가 받는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다. 국제 경제는 자유무역보다 무역장벽을 쌓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 대량실업과 해고는  노동자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 나라 노동조합은 이제 생존전략에 대해 고민할 때가 왔다. 

 

 

강의용어

 

<한국 방송통신대학교 교재 '노사관계론' 발췌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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